산 자와 죽은 이의 러브스토리 간직한 만복사지풀어
  • 우용원 편집국장
  • 승인 2021.06.28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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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이다 님이시여! 저버리진 마옵소서”
양심묵 남원시 민선 초대 체육회장이 전하는 ‘사랑의 도시 남원 이야기’
만복사지 전경
만복사지 전경

전북 남원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갖고 성찰해 보면 남원은 역사적으로 지방행정의 중심이었고, 지리산과 섬진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풍부한 역사문화 자산을 토대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도시라는 매력에 빠지게 된다. 임순남타임즈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도시 남원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양심묵 남원시 민선 초대 체육회장이 모 일간지에 ‘사랑의 도시 남원’에 대해 소개한 글을 차례로 담아본다. /편집자주

남원은 발길 닿는 곳마다 다양한 문화재, 문화자원이 산재해있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리우는 곳이다. 조금만 발걸음을 옮겨도 광한루, 실상사, 만복사지, 황산대첩비지 등 어느 곳이든 쉽게 문화유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이번 호에서는 남원 시내 서쪽에 있는 만복사지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한다.

만복사지(萬福寺址)는 아주 오래된 사찰 터로 고려 문종 때 창건했지만,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에 의해 소실됐었다.

그 후 1678년(숙종 4)에 남원부사 정동설(鄭東卨)이 소실된 만복사를 중창하려 했으나 규모가 너무 커서 복원하지 못했다고 하니 사찰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보물 제30호 만복사지 오층석탑
보물 제30호 만복사지 오층석탑

이런 만복사지를 스쳐 지나가면 그저 석불과 석물, 사지 터만 남아 있는 텅 빈 공간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이곳에 남아있는 유물들은 찬란했던 옛 만복사를 그려내기에 충분하다.
 
넓은 사지에 오층 석탑과 당간지주, 석좌, 양면 불로 예술적 조형미가 뛰어난 석조여래입상은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고, 몇 년 전 발굴된 석인상은 강한 위엄 아래 푸근함이 가득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뭐니뭐니해도, 내게 만복사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숭고한 사랑이야기로 집결되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만복사는 조선 전기의 시인이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린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라는 소설을 지칭한다.

‘만복사저포기’는 생사를 초월한 사랑을 다룬 전기소설로, 만복사가 그 배경이 됐고, 내용은 이렇다.

부모를 일찍 잃고 결혼도 못하고 남원에 사는 양생이라는 노총각이 어느 날 달밤에 나무 아래를 거닐며 “한 그루 배꽃나무 외로움을 달래주나 휘영청 달 밝으니 허송하기 괴롭구나.…”란 시 한수를 읊었는데... 시한수가 끝나자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대가 진정 배필을 얻고자 한다면 무엇이 어려우랴” 라고.

이에 양생은 속으로 기뻐하며 다음날 소매 속에 저포(樗蒲:나무로 만든 주사위를 던져서 그 사위로 승부를 다투는 놀이)를 넣고 부처님을 찾아가 소원하기를 “제가 오늘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할까 합니다. 만약 제가 지면 법연(法筵)을 베풀어 치성을 올리기로 하고, 부처님께서 지시거든 나에게 아름다운 배필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저포를 던져 양생이 이기게 된다.

그리고 양생은 불좌 아래 숨어 동정을 살피고 있었는데, 잠시 후 열대여섯 살쯤 보이는 아리따운 처녀가 나타나 자신의 불행을 하소연하고 축문을 불탁 위에 놓고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올린 축원문은 왜구의 침입으로 부모 친척과 노복(奴僕)을 잃고 벽지에서 외롭게 지내는 자신에게 배필을 얻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청이었다.

양생은 춘정(春情)을 이기지 못하고 뛰어나가 그녀를 대하였다. 이렇게 만난 두 사람은 부부의 정을 맺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녀는 양생과 함께 개령동(開寧洞)에 있는 자기 집에 머물며 밤새 시를 주고받으며 지내다가  삼 일째 되던 날 양생에게 이별을 고하고, 은잔 하나를 건네주면서  “내일 저의 부모님이 보련사(寶蓮寺)에서 음식을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낭군께서 저를 버리시지 않으신다면 보련사 가는 길에 자신과 함께 기다렸다 부모님에게 인사드려줄 것”을 부탁했다.

다음날, 양생은 보련사 가는 길에 그녀의 부모를 만난다. 그런데 그녀의 부모는 3년 전 왜구들이 쳐들어와 자신의 딸을 죽였는데, 장례를 치르지 못해 개령사(開寧寺) 옆에 가매장을 하고 정식 장례를 미루다가 오늘이 죽은지 1년 되는 대상날이라 절에 재(齋)를 베풀어 명복을 빌러 가는 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양생은 그때서야 자신이 사랑한 여인이 죽은 영혼임을 깨닫게 된다.

이튿날 양생은 개령동에 옛 자취를 찾아 제물을 차려놓고 지전(紙錢)을 불살라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그녀 부모에게 받은 토지와 가옥을 팔아 사흘 저녁 제를 올려 영혼을 달래고 명복을 빌어주었다. 그 후 양생은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남원의 4대 고전 중 하나로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루는 동시에  산 자와 죽은 이의 시공(時空)을 초월한 스토리다.

보물 제31호 만복사지 석좌
보물 제31호 만복사지 석좌

만복사저포기는 작가의 삶과 관련지어 해석되기도 한다.

이 작품을 지었던 김시습 역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으며, 불도에 심취하여 승려가 된 것 또한 양생의 삶과 흡사한데다가 또 만복사저포기에서 여귀(女鬼)는 현실인 김시습을 상징하기도 한다. 왜구가 침입한 난리통에 절개를 지키려다 죽은 여귀는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기구한 운명의 절절한 사연을 부처님께 올리며 배필을 점지해서 기도한 것 역시 김시습의 당대 내면의식을 형상화한 것이다.

춘향전이나 흥부전이 신분상승이나 개혁, 권선징악의 시대적 사회성을 다루고 있었다면 만복사저포기는 순수한 남녀의 사랑으로 이야기가 귀결되며,  특히 산자와 죽은 자의 사랑을 빗대어 이승의 한과 삶이 끝이 아님을 알린다.

윤회를 벗어난 세계가 공(空)의 세계이고, 그런 경지에서 맞이하게 되는 세계가 참다운 복의 세계임을 즉, 만복사인 것을 만복사저포기를 통해 후세에 알린다.

우리 남원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 발길 닿는 곳마다 다양한 문화재, 문화재들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그런 내 고향, 남원이 정말 한없이 자랑스럽다.

그 옛날, 산자와 죽은 자의 사랑이야기가 궁금할 때, 남원시 왕정동으로 ‘만복사지’의 마당으로 향해보자. ‘만복사저포기’를 통해 환생한 양생이 현세에도 배필을 찾고자 휘영청 밝은 밤에 시 한수를 읊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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